[생각과수필] 그때가 맞았어
반토막난 집으로 이사를 하기위해 버릴 짐을 최대한 골라내며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20대부터 받은 여러 편지와, 엽서와, 버리지 못했던 선물들과 말라비틀어져 원래의 색상은 짐작도 가지 않는 최초의 꽃이 잡다하게 가득 든 상자가 이 집으로 이사오기 7년전에 포장해둔 그대로, 모서리마다 세월을 끌어안고 있었다.
꽃을 보며,
아 그래 이건 그날 나를 두시간이나 기다리며 샀던 꽃이었지. 기다리는 두시간이 설레고 기대돼서 즐겁기만 했다던 과장섞인 표현과 우쭐우쭐하거나 장난 가득할때 보이는 그 특유의 입모양이 되살아났다.
그래, 이래서 버릴 수 없는거야.
잊고 있던 기억도, 바래버린 추억도 다시 재생할 수 있는건 남겨진 무언가가 있을때 뿐이거든.
나는 다시 그 꽃을 상자에 넣었다.
상자속 작은 박스를 열자 세 사람의 군번줄이 나왔다. 이 상자 속에 없고 내 어느 가방안 어느 작은 주머니 속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을 그것까지 치면 네개나 있다.
이름과 군번과 혈액형이 적힌 그것들.
나는 연달아 네번, 군에서 제대 한지 오래지 않은 사람들과 예쁜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처음 사람은 비형이었고 두 번째 사람은 오형이었고 그다음 사람은 비형, 그리고 마지막 군번줄도 비형.
나이는 제 각각이지만 그들은 내게 동일한걸 남겼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때는 이런걸 받고 기뻐했던것 같은데 왜 기뻤던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무슨 마음으로 내게 이것을 주었을까?
이사를 하고 난 뒤 동료들과 이 에피소드를 말하자 남자 동료가 말하기를, '돈도 없고 줄 수 있는게 없어서.'란다.
글쎄, 난 알 수 없다.
그래서 적어도 그걸 주는 그때는 오랜기간 몸에 지녔던 것이기에 준걸거라고, 그만큼 우리도 가슴에 오래 지니자는 의미로 줬을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때마다 내가 기뻐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하리라.
작은 상자에는 군번줄 외에도 이상하게 갈아만든 쇠붙이 반지, 얽어놓은 작은 십자수, 그리고 군복을 찢어 직접 바느질해 수놓은 아래의 것이 있었다.
이걸 보니 웃음이 났다. 어쩜 그때나 지금이나 이 물건은 같은 상상을 하게한다.
네 사람 모두 적지않은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이들이었다. 소재의 정체모를 반지와 얽어놓은 형편없지만 악동같은 느낌이 드는 십자수와 바느질해서 하트모양을 내고 글씨를 내고 주머니까지 만든 쓸모 없는 작은 쿠션까지, 내무반에서 개인일과 시간에 이런것을 만들고 있었다는게 퍽 우습고 귀엽고 기특하고 놀라웠다.
아 이러니까 못버리지.
글씨는 범인으로서 도저히 상상할수 없이 개성이있고 힘이 가득 실린, 천상천하제일악필일것만 같은 모습으로 가방 여기저기에 숨겨두어 기쁨을 주었던 쪽지들. 삽시간 틈에 적어 숨겨야했기에 내용은 별것 없는 아주 사소하고 무한반복적인 것이지만,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그사람이 내게 최고로 하고싶은 말이었을 것이고 최후로 하고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아 이래서 못버린다니까.
나는 짐을 싸다말고 두시간을 그것들 하나하나 떠들어보며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 함께한 그들을 생생하게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땐, 그랬지.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으로 상실감과는 또 다른 설명하기 오묘한 상실감이 들어왔다.
'그땐, 그랬지.' 와 동시에 여운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때 내가 맞았어. 헤어질땐 틀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때가 틀렸어. 지금 보니까 그때가 맞았어. 그때는 따지지않고 감정에 충실했거든.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사람들이, 뽀얗게 먼지가 앉아 더욱 몽환적인 상자속에 꼬깃꼬깃 가득 남아있지.
20160314 1733.
방배동, 사람 하나없이 조용한 오컬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