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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수필] 건강보험증

새벽3시. 2019. 7. 12. 16:49

어떠한 연유로든 회사는 결국 갈가리 찢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새로운 기업에 새로 입사를 한 것처럼

새로운 사무실로, 한번도 같이 지내본 적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일은 같고 이름들은 같은데 모든게 낯설었다.

엄마에게서 강제로 젖을 떼인 아이만큼 가장 서러운 거절은 없을 것이다.

아이가 처음에는 서러워서 울지만 나중에는 불안해서 운다.

그것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삼일... 일주일, 이주일...

시간은 내가 정신을 못차리고 눈코뜰새 없이 바쁜 사이, 저만치 도망가버렸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다, 분명히 아무렇게나 아가리에서 무언가를 게워내듯이

쑤셔박고 있는 우편물함을 늘상 보았건만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동안 한번도 꺼낼 생각이 없었는데, 깊은 어둠만 잡아먹고 있는 우편함에 관심이 생겨 다가갔다.

과연 우편물이 어디론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대체 무슨일이람.' 이라면서

뚜껑을 한번 들었다 슬쩍 내리치며 놓았다.

뒤도는데 허연 봉투가 아가리 속 저 바닥에 깔린 것이 얼핏 보였다.

 

다시 뒤를 돌아 그것을 손톱날을 세워 긁어서 집어올려 봤더니 건강보험공단에서 온 것이었다.

단순히 건강검진 받으라고 하는가보다 생각하며 집에 들어와 마루에 내평겨쳐 두다가

자기 전에 치우려고 뜯어보니 건강보험증이 들어있었다.

 

나는 가만히 이 건강보험증을 들여다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건강보험증이었다.

참 오랜 세월이 흘러, 건강보험증의 심볼도 달라졌고 디자인도 살짝 변하였지만

그 속내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린시절 건강보험증을 꼭꼭 읽어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병치레가 잦아 자주 병원에 갔고, 건강보험증은 평치면 줄줄이 이어지는 그 면면 칸들을 새카맣게 채웠었다.

한때는 건강보험증이 신분증을 대신하기도 했던 적이 있다.

혹시나 아직도 그러려나 싶어서 봤더니 이젠 개인의 주민번호는 적혀있지 않았다.

 

처음 내가 회사에 입사했을 때 받았던, 부모님 아래가 아닌 나 홀로 떡하니 맨 위에 적힌 나만의 건강보험증을 받았을 때도 생각이 났다.

그때만해도 아직 병원에는 건강보험증을 가져가야했다. 전산화되어있지 않았기에 보험증없이는 값비싼 진료비를 물어야했다.

그때 이후, 처음 이 건강보험증을 받아본 것이다.

세월이 벌써 17년이나 흘렀다.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하고 즐거워졌다.

어째서 요즘같은 시대에 건강보험증이 내게 온 것인지 잘 알수는 없지만..

(어쩌면 내가 신고하면서 보험증발급란같은 곳에 체크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이녀석 덕분에 잠을 푹 잘 것 같다.

 

어쩌면 이 따뜻함은 그래도 나는 아직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작은 위로를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60716 0147.

집에 와서 잘준비하다 발에 밟힌 우편물을 뜯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