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과수필] 선호합니다. (필경사 바틀비의 말)텍스트/생각과시 2019. 7. 11. 12:14
벌써 6년.
대필을 시작한지 12월 말일부로 6년이 된다.
어느 때는 일주일에 1편을 어느 때는 일주일에 3편을 보냈다.
나의 요구는 늘 같았다. 일주일에 1편만 하자.
짧은 글 한편,에 10만원을 받았다.
나는 내 정신을 10만원에 팔고 있었다.
온전한 정신을 10만원에 팔 때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미친 정신을 10만원에 팔 때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래서 일주일에 1편 이상은 쓰지 않기를 원했다.
어느날은 '필경사 바틀비'라는 단편을 보고 바틀비의 말을 따라 했다.
다음달 원고 미팅에서 한달동안 15편을 써달라는 요구였다.
전 같으면 구구절절 이유를 붙여 편 수를 조정했을 것이나
그 날은 '일주일에 한편만 쓰기를 선호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담당자가 꽤 당황하는 눈치였다.
'선호합니다.'라는 말이 거절이어서라기보다 많이 어색한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묘하게 즐거웠다. 담당자가 물었다.
'선호한다뇨?'
나는 대답했다.
'한편만 쓰는 쪽을 선호합니다.'
바틀비가 했던 것처럼 그저 무표정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결국 선호한다는 말의 위력에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처럼 그도 나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 달은 10편을 쓰기로 합의했다.
나는 6년간 대필을 하며 글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질려버려서 내 글은 쓸 수 없었다.
어쩌면 마감에 쫓겨 사붓이 명상할 수 없음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글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글이었다.
주제는 물론 갈래, 소재에 대한 제약이나 어투에 대한 제약, 특히 시간의 제약.
나는 늘 내가 쓰고 싶은대로 쓰고 결국 수정을 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건 아기를 낳고 자신의 아기 모양을 바꾸려고 난도질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그런데 왜 이걸 계속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게. 왜 계속 할까? 나도 의문이다. 딱히 돈이 부족해서는 아닌데.
지금까지 3.3%의 세금을 떼고 받은 원고비만 차곡차곡 쌓인 통장을 봤다.
일부러 은행이 흔치 않은 곳에 입금용으로만 만들어둔 통장이라 근 6년간 쌓인 금액이 삼천만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그만두면, 다 써버려야지. 이 돈으로 해방 잔치 벌여야지.
한번, 삼년 쯤 지나 관둔 적이 있었다. 회사일은 일대로 바쁘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몸까지 상한 때였다.
그 해까지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하지만 계약이 종료되고 두달이 좀 지나 다시 연락이 왔다.
너무 급해보였다. '새로 구한 작가들이 잠수탔어요.'라며 잠시만 도와달란다.
그렇게 다시 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 글쎄, 왜 계속했을까?
지난 주 최종 미팅을 다녀왔다. 올해를 마무리 짓기 위함이다.
'쓰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텍스트 > 생각과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각과수필] 자발적 식민 치하에 생산된 잉여, 레디메이드 인생 (0) 2019.07.11 [생각과수필] 왜 같지 않을까? 글씨체에 궁금함을 묻다 (0) 2019.07.11 [생각과수필]흔들림에 대하여 (0) 2019.07.11 [詩] 흔들린 사진 (0) 2019.07.11 [생각과수필] 거절의 부담(음식에, 맛에 관하여) (0) 2019.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