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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수필] 자발적 식민 치하에 생산된 잉여, 레디메이드 인생텍스트/생각과시 2019. 7. 11. 13:58
공식적인 '바쁨'이 끝나고 오랜만에 동생을 만났다.
동생을 만난 건 바쁨이 끝난 것을 자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동생을 만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팔개월 전, 동생이 '언니 나 해외 취업 알아볼까?' 라고 물었을 때 나는 3초동안 멈칫 했다.
최고의 폐쇄와 권위, 최대의 암투와 비리의 온상, 어쩌면 일반 사회보다 더 찌든 사회 같은 연구실에서 힘들게 버티고
빼앗길 만큼 다 빼앗기고, 다칠만큼 다치고 얻은 석사 졸업장은 2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깨끗했다.
2년간, 최저시급을 한참 밑도는 임금과 4대보험은 커녕 최소휴식도 보장하지 않는 숨막히게 비좁고 빙판진 바닥에서
발붙여 보겠다고 '열정'의 맨발로 혈안을 한 채 입술을 깨물며 버텼던 녀석이 드디어 발을 떼겠다고 한다.
3초간, 동생이 보낸 5년이 주욱 스쳐지나갔다.
"어, 그래. 어디든 이 곳 보다 못 하진 않겠다."
인종차별이라든가 외로움, 범죄 노출 이런 것조차 이 곳 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민족이라고 인종차별은 없는 이곳에서 환경차별이 있고, 자아성취를 할 일터가 없는 외로움이 있고,
취업이라는 사기로 갈취하는 젊은이의 노동력과 시간의 범죄가 있다.
어느 곳이 이곳 보다 못하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아라.
그렇게 다독이며 자리 잡을 때까지 물심으로 돕겠다고 했다.
그리고 팔개월이 흘렀다. 동생은 올해 말에 캐나다로 떠난다.
취업이 잘 되어서 가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또 다시 고생하고 설움을 삼키고 시간과 돈을 쓰러 간다.
동생과 동생 주변 사람들은 이제 거길 가서 무얼 하겠느냐고, 모험하지 말고 이곳에서 찾으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가 많음'은 최악의 취업조건이다.
우회하여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빠듯한 취업조건의 나이에 들었을 때 늙은 여우들이 휘두른 혓바닥에
순박하게 굴속으로 들어간 채 2년의 경력은 인정받지도 못하고 최악의 취업조건을 갖춘 상황이 온 것이다.
동생이 내방역에 도착했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5분간 걸어 나가는 사이 수 없이 많은 감정이 스쳤다.
일전에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나는 한국사회에서의 의무인 '병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엉뚱한 얘기를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병역 외에도 남녀 구분없이 져야할 '암묵적인 의무'가 있지요."
라고 말했다. 그건 바로 '대학 진학'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 대학 진학이 사회의 암묵적(묵시적) 의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에 미용실에 간 적이 있는데 옆에 모녀가 머리를 하러 왔다.
미용사는 엄마에게 딸이 몇살이나고 묻자 딸의 엄마는 이제 곧 스물 된다고 했다.
"아유~ 새내기네~ 수능은 잘 봤고?"
그러자 딸은 당황한 눈치였고 딸의 엄마는 주물주물 하다가 "수능 안봤어요. 대학 안가요....."
라며 기어들어가듯 말한다. 그 말을 듣는 나는 거울을 통해 모녀를 살폈다.
딸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우울한 기운이 퍼졌고, 엄마의 표정은 죄인 같았다. 목소리까지..
미용사는 뒤늦게 수습을 하느라 요즘 누가 다 대학가냐는 둥, 자기 하고 싶은거 하면 되지라는 둥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사회의 암묵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모녀의 침울함으로 산산 조각 나있었다.
위의 예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스물, 스물한두살 그보다 몇살 더의 나이인 젊은이들과 대화하게 되면
'전공이 뭐야?'라든가, '학교 친구?'라든가 무엇이든 질문을 할 때 '대학'과 연관을 짓는다.
대학을 가는 일이 언제부터 일반화 된, 당연시 되었을까? (10년 전만해도 이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렇게 사회의 암묵적 의무가 되어버린 대학 진학은 부모의 유/무언 압박으로도, 학교의 압박으로, 주변의 시선에 의해서등
사회의 암묵적 강압에 의해 어린 학생들은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젊은이들은 '사당오락(四當五落)'이라는 웃지못할 사자성어까지 낳아가며 자신을 돌아볼 여유 없이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해서 조금이라도 더 순위가 높은, 조금이라도 더 서울과 가까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가까운 미래의 '희망'으로 삼는다.
그렇게 해서 10년간 배출한 걸출한 인재들은 다 어디로 갔나.
올 봄에 국가의 웬수가 발이 데일 듯 뜨거운 곳을 안전화를 신고 여행 후 잉여 처분 대책으로 해외판매에 관한 언급을 했었다.
그러자 왕비는 독에 불을 붓고 신하는 독밑에 꼭지를 달아 잔치를 벌인 중동,동남아 해외취업.
그때 이걸 보고, 아.. 50년전, 당시의 수공업 재고들이 춥다고 징징댔더니 이제는 단순하게 뜨거운 곳이구나 싶었다.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자며, 고작 3천명이 뭐냐며 전 대를 비웃듯 청출어람으로 1만명 보내겠다는 그 모습이 시대의 어머니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내내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 이미 중동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10년간 배출한 걸출한 100만의 인재들이 모두 중동으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1명은 안간 게 확실하다. 동생은 한국에 있으니까.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밥생각이 없다하여 우리는 차를 한잔 하기로 했다.
떠날 날이 이주가 채 남지 않았기에 나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했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하는데... 라든가 집을 구하면 짐 좀... 이라든가..
나도 빠듯한 생활이지만 다리도 아니고 손 한 쪽 뻗칠 곳이 여기 밖에 없는 데 그마저 뿌리칠 순 없었다.
"이제 2주간 뭐할거야?"
내가 물었다.
"그냥... 짐 싸면서..."
괜히 물은 것 같았다. 잉여짓은 너무 익숙해서 더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10년간 생산된 레디메이드는 창고에서 재고정리로 팔릴 기미도 없이 켜켜이 쌓여있을 뿐이기에
간간히 팔려버린 물품들과는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막 시작 된 연말로 바쁘기 때문이다.
동생과 헤어져 집으로 올때까지 대략 3분의 시간이 걸렸다.
3분의 시간동안 43년의 세월이 흐른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2년... 뜻없이 채만식이 생각났다.
일제강점기, 솥뚜껑에 놀란 지배국이 벌인 사기 정책으로 생산된 경제적 기형아, 피지배국 인텔리들의 자조섞인 작품들도 생각났다.
그리고...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김사량, 한설야, 김구... 최남선.. 주요한.. 서정주.. 이광수.. 김동인.. 장혁주.. 이승만..
무엇인가 두서 없이 여러 인물들도 떠올랐다.
방금 밥먹고 왔는데 위가 쓰리고, 배가 쏘록쏘록 아프다.. 식은땀이 나고.. 초점이 흔들려 눈 앞의 달력이 잘 안보인다.
아... 지금이 몇년도지....?
20151213 2222.
동생과 헤어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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